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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만의 승리 [2004년 09월 08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899



▶ 필자(左)와 포철 직원들이 광양만의 배 위에서 지도를 보며 제 2제철 예정 부지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아산 낙점' 통보를 받은 유상부 부장은 즉시 나를 찾았다. 그러나 연락이 안 닿았다. 우리 직원들은 다급한 나머지 진정서를 내기로 의견을 모았고, 유 부장이 밤새 진정서를 썼다. 조말수 서울사무소장이 그 진정서를 들고 이튿날 새벽 5시에 이학봉 서울지역 보안대장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고교 동창생이었다.

그날 나는 미국 출장을 가게 돼 있었다. 전말을 듣고 보니 겁 없이 설친 직원들의 충정을 나무랄 수만도 없었다.

"최고통치자의 결정은 결정적 하자가 없는 한 번복되기 어렵다. 그래도 이왕 엎질러진 물이니 국가경제를 위해 끝까지 밀고 나가보자."

오후에 국보위에서 나의 뜻인가를 확인하는 전화가 왔다고 했다. 틀림없는 나의 뜻이라는 답변을 전해들은 국보위는 제2제철소 최종 입지 선정을 유보시켰다. 광양이냐, 아산이냐. 이제 포철의 씨름 상대는 국보위로 바뀌었다.

이 해 11월 1일, 나는 입법회의의 경제 제1위원장이 되었다. 나름대로 발언권을 확보한 셈이지만, 포철이 확실히 이기는 길은 과학적 데이터를 완벽하게 확보하는 일이었다. 12월에 나는 '지반 조사반'을 구성, 반장인 유 부장과 이명섭 등을 광양만으로 보냈다. 미국 지질용역회사인 DM의 전문가도 합류했다. 혹한의 바다에서 그들은 사투를 벌였다. 미국 MIT를 나온 29세의 게리 추트 박사가 "나이지리아의 악어가 사는 늪에서도 일해 보았지만 이곳보다는 나았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

12월 27일, 정부는 아산만과 광양만을 비교 검토하는 용역조사를 결정했다. 국토개발연구원과 프랑스 르 아브르 항만청이 공동으로 맡았다.

광양만의 약점은 연약 지반이었다. 그러나 광양과 비슷한 지반에 제철소를 세운 일본의 경험을 접목시키면 너끈히 해결될 문제였다. 일본의 전문가 미히로기 박사도 직접 광양만을 살폈다. 그는 나에게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국토개발연구원이 건설부 산하인 탓인가. 이런 의구심이 생길 만큼 용역 중간보고서는 건설부가 미는 아산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모종의 이해관계가 개입됐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결국 안기부가 아산만과 광양만 일대의 토지 소유 현황을 샅샅이 조사했다. 여기에서 광양만은 깨끗한 반면, 아산만은 의혹이 생길 만한 결과가 나왔다. 일단 포철이 유리한 고지에 선 셈이다.

지루한 공방과 논쟁 끝에 드디어 결론을 낼 시간이 다가왔다. 1981년 11월 4일, 국회 재무위 상임위원회를 진행하던 나는 쪽지를 받고 급히 청와대로 달려갔다. 대통령.부총리.경제장관들과 청와대 경제비서관들이 모여 있었다.

먼저 건설부 쪽에서 아산만의 제철소 입지 타당성을 브리핑했다. 귀 기울여 듣던 전 대통령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박 위원장은 의견이 많으시겠지요?" "그렇습니다." 내가 일어섰다. 요지는 셋이었다. 아산만의 지하 암반은 45도로 경사져 파일을 안정시키기 어렵다, 간만의 차가 커서 15만t 짜리 도크를 만들자면 그 비용과 시간이 엄청나다, 광양만의 연약지반을 개량할 공법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윽고 전 대통령이 눈을 들어 벽에 걸린 지도를 쳐다보았다.

"나는 철은 몰라도 안보는 압니다. 태안반도는 휴전선과 가깝고 저 산둥반도 쪽에서 내려오는 북한 공작선이 침투하는 목표지점입니다."

오랫동안 밀고 당긴 제2제철소 입지가 드디어 광양만으로 최종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2004년 09월 08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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