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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제철소 입지 [2004년 09월 07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60



▶ 제 2제철소 입지 선정을 위해 국회 조사단이 필자(앞줄 오르른쪽에서 둘째)의 안내로 배를 타고 전남광양만 일대를 둘러보고 있다.


"너는 임마, 토목기술자로서 양심도 없는 놈이야! 박 사장이 시킨다고 안 되는 일을 된다고 고집을 부려? 나는 27년간 항만을 해온 사람이야. 내가 직장 구해줄 테니 당장 그만둬."

1980년 6월 서울 삼청동 국보위 건설분과위원회는 시끄러웠다. '사범학교 갓 나온 청년교사 박정희'의 제자였던 건설부 Y국장이 포철 공사부장 유상부(포스코 회장 역임)를 질책하는 고함이었다. 그 옆에는 권총을 찬 C대령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제2제철소를 광양만에 세우자고 주장하고, 건설부는 아산만을 고집하던 때였다. 포철과 건설부를 대신해 유 부장과 Y국장이 부닥친 것이다.

제2제철소 입지 선정의 일차적 책임과 권한은 건설부에 있었다. 78년 가을 후보지는 서해안 가로림만이었다. 처음에는 서해안 아산과 동해안 영해였다. 하지만 영해를 택했던 현대가 재빨리 서해안 가로림으로 바꾸고 경제수석 O씨를 설득, O씨가 대통령에게 가로림을 건의했다. 현대는 제2제철 사업자 경쟁에서 탈락했지만 가로림은 여전히 입지 1순위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제2제철 사업자가 포철로 결정된 뒤, 그러니까 78년 11월 박 대통령은 나를 헬기에 태워 가로림 지역으로 날아갔다.

"박 사장, 가로림이 어떤가?" "수많은 기술.경제적 요인들을 검토해야 합니다." 박 대통령은 침묵했다.

제철소 성패를 좌우할 입지 선정에선 누가 뭐라든 포철의 판단이 반영돼야 했다. 79년 5월 초 나는 외국기관이 조사한 가로림과 아산만 자료를 놓고 포철 임원들에게 무기명으로 점수를 매겨보라고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 둘 다 123점이었다. 이어 국내 4개 업체의 평가 결과가 나왔다. 현대만 가로림이고, 동아.대림.삼환은 아산이었다. 결국 건설부의 뜻대로 아산이 선택됐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제2제철소 부지는 아산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아산만 현장을 직접 조사한 포철 직원들은 중대한 결함들을 찾아냈다. 개량하기 힘든 악성 연약지반, 초중량 구조물을 견디기 어려운 편마암 지대, 여기에다 조수 간만을 극복하기 위한 거대한 갑문도 필요했다.

이때부터 나는 광양만을 생각했다. 광양은 73년 제2제철 이야기가 처음 나올 당시 후보지로 거론된 곳이기도 했다. 나는 이맹기 예비역 해군 제독을 찾아갔다. 배가 정박하기에 어디가 가장 좋으냐고 물었더니, 대뜸 광양만을 꼽았다. 나는 79년 말 유상부에게 지시했다.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이야. 중공업 가동률을 높이려면 제2제철 건설이 시급해. 전남 광양을 조사해봐."

그래서 80년 1월 혹한의 겨울에 포철 조사반은 김 장사로 위장하고 광양만으로 갔다. 광양은 아산보다 훨씬 양호한 조건이었다. 최대 약점이던 연약지반은 일본의 경험에 따라 모래말뚝 공법으로 얼마든지 개량할 수 있었다. 포철은 광양과 아산을 비교분석한 과학적 데이터를 정리했다.

80년 6월 건설부 Y국장과 맞선 포철 유 부장의 머리엔 바로 그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최종 판단 권한은 역시 정부에 있었다. 7월 7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실에서 포철 사장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내가 사무실을 비웠을 때였다.

"박 사장께는 죄송하지만, 전직 대통령께서 정하신 아산이 역시 더 좋다고 전해주시오."


2004년 09월 07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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