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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의 개막전 [2004년 09월 05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773



▶ 포철 창립 10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는 필자.


이듬해(1975년) 3월, 한국제철은 스스로 백기를 들었다. 파트너로 잡은 US스틸이 '투자 수익률 20% 보장 및 포철 3기 공사 80년까지 연기'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이러자 국무회의는 "경영난에 봉착한 한국제철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포철에 제2제철소를 건설할 권리를 인정한다"고 결의했다. 포스코에 저절로 굴러온 복이었다.

'바다의 붕어'라는 전어가 있다. 포항 사람들은 "가을 전어에는 깨소금이 한 줌 들었다"고 말한다. 77년 가을, 영일만 포철에도 깨소금이 가득했다. 모든 게 너무나 순조로웠다. 4기 설비 구매협상에서 오스트리아.프랑스.영국은 착수금(통상 15%) 없이 설비 공급과 건설에 착수하기로 했다. 국회가 포철 4기의 내자(內資) 예산을 전액 삭감하자 나는 미국 씨티은행 홍콩지점에서 최초로 '정부 보증 없는' 차관 1억달러를 성사시켰다.

이때까지 나는 '현대'와 '정주영'이란 강력한 복병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박 사장님, 현대가 제2제철을 먹으려 합니다. 이미 진도가 상당히 나갔어요."

78년 신년 하례를 마치고 나오는 나에게 한 언론인이 귀띔해줬다.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했지만 소문은 사실이었다. 중동 건설붐을 타고 오일 달러를 벌어들인 현대는 곧 현대중공업 중심으로 자본금 2억달러의 '현대제철'을 설립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었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들이 현대 편이라는 정보까지 들어왔다. 제2제철 쟁탈전의 2막이 오른 것이다. 이번엔 강적이었다. '오너'가 이끄는 재벌기업이었다.

포철은 첫 단계 승부를 여론싸움에 걸었다. 무엇보다 홍보력의 우위가 절실했다. 그러나 재벌 사기업에 비해 국영기업인 포철은 홍보예산과 인력에서 절대 열세였다. 소공동 KAL빌딩에 세든 포철 서울사무소의 홍보전담 요원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현 포스코 부사장 윤석만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않았던가. 홍보팀에 '포철 정신'을 주문했다.

"사장님, 조금만 참고 계십시오. 4월 1일이 창립 10주년입니다. 그날을 절정으로, 한꺼번에 해냈으면 합니다."

공보담당 이대공의 건의를 수락했다. 포철 스스로 '우리는 이렇게 해냈다'는 잔치 마당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주요 인사들의 공장 견학에 동행했고, 저녁 자리도 빼놓지 않고 참석했다. 말로만 듣던 '영일만의 기적'을 두 눈으로 확인한 사람들은 경탄과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으로 나는 현대에 먼저 한방을 먹이라고 지시했다. 포철은 3월 21일 전격적으로 상공부에 '제2제철소 예비계획서'를 냈다. 그러나 이튿날 현대도 예비계획서를 제출해 방어에 나섰다.

4월 1일, 나는 창립 10주년 기념사를 읽어내려 갔다. 현대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란 메시지를 담았다. "…행운의 여신은 민족적 대의를 위하여 인내하며 정진하는 자의 편에 설 것입니다."

국내 언론들은 포철 10주년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영일만 현장이 생생하게 소개되면서 우리는 초반 기세 대결에서 승기를 잡았다. 우리 홍보팀의 노고도 컸다. 현대는 소나기를 피하고 싶었던 걸까. 판세를 관망하면서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여론을 업었다고 해서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청와대가 문제였다.


2004년 09월 05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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