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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눈 든 오히라 [2004년 08월 31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824



▶ 대한국제제철차관단과의 협상이 결렬된 다음날, 국내 신문들이 게재한 제철소의 앞날을 우려하는 기사들.


도쿄에서 야스오카 선생부터 만나 설득에 나섰다. "…제철소 없이 한국은 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다. 나의 청을 받아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일본 최대 제철소인 야하타제철(1970년 4월 1일 후지제철과 합병해 '신일본제철'로 바뀜)의 이나야마 사장. 그는 일본철강연맹 회장이기도 했다.

"내 방에 한국 포철의 박 사장이 와 있습니다. 그의 꿈이 실현되도록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몇 블록 건너 이나야마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십수년 연상인 이나야마는 시종일관 온화한 표정으로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묵묵히 들어주었다.

"… (일본의 제철) 기술 이전에는 고도의 정치적 결정이 뒤따를 테지만 협력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입에서'협력'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튀어나온 순간 나는 구원의 동아줄을 꽉 잡은 느낌이었다. 그는 후지제철의 나가노 사장도 만나게 해주었다. 이 때부터 이나야마는 포철의 제일 큰 은인이 되었다.

1969년 3월, 서울로 돌아온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김학렬 경제수석이 '대일 청구권자금'에서 남은 돈이 약 8000만달러라고 했다. 대통령은 이 자금을 즉각 동결시키고 당분간 비공개로 다룰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두 달 뒤인 5월 7일, 박충훈 부총리가 '종합제철 프로젝트 재검토' 발언을 했다.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과의 협상을 위해 외국까지 나갔지만 빚도 얻지 못하고 홀대를 당한 데 대한 하소연이나 다름없었다. 이튿날 신문에는 "차라리 제철소를 짓지 말고 철을 수입하라"는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진노했고, 결국 6월 2일 박 부총리를 경질했다. 장기영 부총리에 이어 종합제철이 또 한 번 부총리를 낙마시킨 셈이다. 후임 김학렬 부총리는 즉각 경제기획원 안에 '종합제철건설 전담반'을 구성했다. 이 때부터 종합제철소 추진은 속도를 내게 됐다.

그해 여름 나는 도쿄에서 많은 정.재계 거물들을 만났다. 외무상 아이치, 대장상 후쿠다, 통산상 오히라 등도 포함됐다. 야스오카의 치밀하고 적극적인 도움으로 나는 많은 우군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애를 먹인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오히라였다. 일본 내각의 의사결정 구조는 '전원합의체'여서 그가 반대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었다. 오히라는 '아주 가느다란 눈을 가진 큰바위 얼굴'의 경제전문가였다.

"산업화의 첫 단계는 농업자립화입니다. 비료공장.농기계공장을 세워 농업부터 일으켜야 합니다."

그는 첫 면담에서 나에게 실눈의 눈동자도 보여주지 않으며 경제학 원론을 강의했다. 꾹 참고 다 들은 다음 나는 한국이 중공업부터 선택한 배경을 설명했지만 그는 실눈을 뜨지 않았다. 이틀 뒤의 두 번째 면담에서도 퇴짜를 맞았다.

일본 내각은 8월 22일 한국의 대일 청구권 자금 전용과 제철소 지원을 결정하기로 돼 있었다. 1주일 전에는 아이치 외무상이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며 22일 각의에서 최종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 되었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오히라가 고춧가루를 뿌렸다. "아직 검토단계며 최종 결정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성명을 냈다. 속이 탔다. 그러나 경제논리에는 경제논리로 맞서야 했다. 부랴부랴 '일본 정부간행물보관소'로 달려갔다. 자료를 챙긴 나는 세 번째로 오히라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일본은 메이지(明治) 30년에 7만t의 야하타 제철소를 지었고,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제철소를 증설했습니다. 그때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현재 가치로 100달러 미만이었고, 제철소에는 안보 차원의 고려가 더 크게 작용했습니다. 현재 한국은 남북대치 상태에 있고, 국민소득도 200달러로 그때 일본보다 높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히라의 실눈이 조금 커지면서 조그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는 느닷없이 자신의 삼촌이 경북 영일군 대송면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얼른 '인연'을 찍어 붙였다.

"바로 거기가 포철이 들어설 장소입니다." "정말 우연의 일치군요." 오히라의 눈은 더 이상 감기지 않았다. 그의 반짝이는 동공은 반대를 철회하겠다는 신호였다.


04년 08월 31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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