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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의 면담 [2004년 08월 29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340



▶ 필자를 포함한 39명의 창업요원들이 포항제철창립식에서 불퇴전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1968년 4월 1일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에서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업식을 개최했다. 조촐한 자리였다. 나까지 포함해 창업요원은 39명. 나를 빼고는 모두가 용광로를 구경조차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기댈 언덕은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밖에 없었다. '그들이 차관을 준다고 했으니 주겠지…'. 막연한 기대에 의지한 출범이었다. 포스코는 이렇게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완전한 무(無)의 상태에서 태어났다. 그래도 우리에겐 확고한 정신이 있었다. 우리가 믿는 유일한 구석이었다.

그해 포스코의 제일 중요한 업무는 KISA와의 예비계약서와 1만쪽이 넘는 장비 구매 리스트 검토, 영일만의 부지 수용이었다. 계약서나 장비 구매 검토는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일본 철강자문용역단을 따로 고용했고, 부지 수용은 거의 행정관청에 위탁했다. 우리는 비관적 전망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부지 안의 가옥과 논.밭.묘지들을 싹 밀어낸 뒤, 만의 하나 KISA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긴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끔찍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68년이 다 지나도록 KISA에서 돈 나올 구멍은 흔히 하는 말로'가물치 콧구멍'이었다. 거대한 몸통에 뚫려 있는 건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작은 가물치 콧구멍-. KISA가 약속한 차관은 도통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사실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이기도 했다. 세계은행의 한국 담당자인 영국인 자페가 "한국의 제철소는 경제성이 없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한마디로 "한국 제철소에 돈 빌려주면 떼이니 금고를 열지 말라"는 경고였다.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69년 1월 하순, 나는 미국 피츠버그로 날아가기로 했다. 65년 박정희 대통령과 얘기해 KISA를 잉태시킨 코퍼스사 포이 회장과 담판을 벌여 확답을 받아낼 작정이었다. 후지제철소에서 연수받고 있던 최주선을 도쿄에서 합류시켰다. 그가 나의 통역을 겸했다. 피츠버그엔 영어 잘하는 안병화도 먼저 가 있었다.

코퍼스사는 세계 최고의 철강 엔지니어링회사였다. 그 대표인 포이와 마주앉았다. 세계 철강업계의 거물과 빈국의 철강회사 대표는 오랫동안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그의 결정은 '노(No)'였다. "자페의 보고서를 무시할 수 없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포이가 제공해준 우아한 듀케인클럽에 투숙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좌절감.배신감.서러움. 이런 감정이 밀려들었다.

오후 11시가 지난 시각, 나는 최주선에게 포이의 방으로 연락하라고 했다. 결례인 줄 알지만 그 영감과 한번 더 부딪혀보기로 작정했다. 포이는 내일 아침에 보자고 했으나 나는 당장 만나야 한다고 맞섰다. 백발이 성성한 정장의 노인과 심야에 마주앉았다. 다시 한번 한국의 딱한 형편을 호소했다. 식민지.전쟁.빈곤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한국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 종합제철소가 얼마나 절실한지 열심히 설명했다.

포이는 미소를 지으며 "당신의 애국심은 이해하나 그것과 사업은 별개의 문제"라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최후의 통첩을 받아든 나는 망연자실했다. 제철소를 짓는다고 남의 집까지 다 허물어놓은 상황에서 돈을 못 주겠다니…. 그러면 포철은 그냥 쓰러져야 하나?


2004년 08월 29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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