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 영상
  • 연구결과물
  • E-카다로그
  • 발전기금
  • HOME
  • 박태준의삶
  • 쇳물은 멈추지않는다
  • 인쇄
  • 글자크기
  • 확대
  • 초기화
  • 축소

게시판 List
축구와 나 [2004년 08월 26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660



▶ 1987년 프랑스 솔락사팀과 포항제철팀 간 친선 축구경기에 앞서 시축하고 있는 필자.


어느 날 상동광산에 내려갔다. 낯익은 사람들이 곡괭이를 들고 있었다. 대한중석 축구단 소속이었다. 국가대표팀 감독 한홍기, 국가대표급 선수 함흥철.김정석.조윤옥 등.

"여기서 뭐하는 거야?" "광석 캐고 있는데요 …."

사정을 알아봤다. 돈 때문이었다. 축구단 운영에 연간 1억원쯤 들어갔다. 그래서 평소엔 회사 일을 하다가 경기가 코앞에 다가와야 합숙훈련을 한다는 것이었다. 대우도 엉망이었다. 부아가 치밀었다. 이런 선수들이 광석 캐는 것 하고, 공 열심히 차는 것 하고 어느 쪽이 더 나라에 도움이 되겠나. 이건 절약이 아니라 낭비였다. 선수들에게 당장 보따리 챙겨 서울로 가라고 했다.

한때 대한중석 축구단은 이름을 날렸다. 지금은 우스꽝스럽게 보일 지 모르겠지만 내가 대한중석 축구단을 만든 그 이듬해 한국 축구에 국가안보적 차원의 비상이 걸린 적이 있었다. 북한이 1966년 런던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그 소식은 권력의 핵심부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혼쭐이 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부랴부랴 '양지팀'을 구성했다. 대한중석도 축구 선수를 차출당했다. 북한과 극단적 체제 대결을 벌이던 때라 그런 해프닝이 일어났다.

나는 축구 팬이다. 소년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기 때문에 야구가 몸에 더 익었지만 광복을 맞아 조국으로 돌아온 뒤로는 축구를 더 좋아하게 됐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한국전쟁이 남긴 배고픔 속에서도 우리 국민은 축구를 사랑했다. 축구는 곧 국기(國技)였다. 이게 첫번째 이유다.

빈곤에 빠진 우리가 축구에선 일본을 이겼다. 한.일 스포츠 경기에서 일본을 이기면 무조건 기분이 좋았다. 특히 축구에서 이겼을 때 국민은 열광했다. 이건 지금도 다르지 않다. 나 역시 그렇다. 이게 두번째 이유다.

73년 7월 3일 포항제철소 1기 준공 기념으로 나는 포스코축구단을 창단했다. 초기엔 대한중석 축구단 멤버들이 주축을 이뤘다. 감독 한홍기, 코치 조윤옥, 선수 이회택.석효길.황종현.최재모.김창일.박수일.최상철 …. 포스코축구단이 막강한 실업축구팀으로 커가는 동안 당대 최고의 축구 스타들이 포스코와 길고 짧은 인연을 맺었다.

포스코는 성장기에 신일본제철의 신세를 많이 졌다. 그들에게서 쇠를 만드는 걸음마부터 배웠다. 그러나 축구만큼은 포스코가 '제철의 어른'인 신일철을 번번이 이겼다. 흑백 TV를 통해 포철 준공기념으로 열린 두 팀 간 첫 친선경기가 전국에 중계됐다. 이회택이 가슴을 타고 내리는 공을 그대로 일본 골문으로 때려 넣는 환상적인 골이 터졌다. 친선경기를 관람할 때면 나는 신일철 사장에게 "오늘은 우리를 한번 이겨 보라"고 약을 올리곤 했다. 큰소리 칠 게 하나라도 있어 좋았다.

포스코는 우리나라에서 축구전용 잔디구장을 가장 먼저 만들었다. 포항과 광양에 하나씩 축구전용 구장이 있다. 포항에 한국 최초의 축구전용 구장을 세울 때는 뒷말도 많았다. 그러나 한국은 2002 월드컵 준비과정에선 인프라 시찰을 나온 국제축구연맹(FIFA) 조사단을 포항구장으로 데려와야 했다. 그때까지도 그게 우리나라의 유일한 축구전용 구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월드컵에서 8강을 넘어 4강까지 올랐다. 대회가 끝난 뒤 나는 홍명보.황선홍.김태영.김남일.김병지 등 포스코 소속 선수들을 신라호텔로 초청해 노고를 치하했다.


2004년 08월 26일 [중앙일보 연재]



첨부파일 첨부파일 :
No File!
게시판 List
이전글 심야의 면담 [2004년 08월 29일]
다음글 세계챔프 김기수 [2004년 08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