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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중석 인재들 [2004년 08월 23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977



▶  대한중석 사장으로 취임한 직후 임원들과 축하연을 연 필자(외쪽에서 둘째). 맨 왠쪽이 고준식 전무다.


유능한 경리장교 황경노·노중열 데려와 고준식 등 기존 인재들과 개혁진용 갖춰
1년 '대수술' 끝에 흑자기업으로 만들어

1964년 12월 8일 나는 대한중석 사장으로 내정됐다. 여기엔 세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정치 쪽으로 진출하라는 권유를 내 스스로 뿌리친 것, 이런 나의 생각을 알아준 박정희 대통령의 고려, 그리고 모종의 권력게임이 그것이다. 권력게임은 권세가 커지는 대통령 비서실장 이후락과 그를 견제하려는 김종필이 벌이는 것이었다. JP는 나를 이후락과 교체하고 싶어했으나, 대미 관계의 끈을 가진 이후락이 눈치 빠르게 대통령에게 나를 대한중석 사장으로 추천했다는 후문이었다. 어차피 나는 정치 방면으로 나설 생각이 없었기에 그런 신경전과는 거리를 둬야 했다.

대한중석이란 이름을 나의 뇌리에 새긴 사건은 52년 6월 한국전쟁 중에 터져나온 '중석불 사건'이었다. 부패한 정권의 고위관료와 정치권이 장사치들과 결탁해 전쟁의 곤궁에 빠진 농민들을 등쳐먹은 파렴치한 범죄였다. 텅스텐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重石弗)로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해 몇 배나 비싼 가격에 되판 것이다. 굶주리는 농민의 피를 빨아먹은 범죄였다. 당시 나는 25세 청년장교로 전방을 지키고 있었다. 결혼도 안 한 나의 피끓는 손이 그 뉴스에 몇 번이나 허리의 권총을 만졌다.

그때 그 분노가 내 인생을 대한중석과 인연이 닿도록 이끌었을까. 그거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65년 초 나는 권총 대신 몇 가지의 확고한 원칙을 들고 대한중석 사장실로 들어섰다.

강원도 상동광산과 경북 달성광산에서 세계 최상급의 텅스텐을 파내는 회사. 34년 일본이 개발해 광복 후 한국 정부가 인수한 대한중석은 절대 빈곤의 시대에 달러를 벌어들이는 알짜 국영기업이었다. 5.16 직후 한국의 연간 외화벌이가 4000만달러 수준에 머물 때 대한중석은 한해 15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이런 효자 기업이 만성적자에 허덕이고 있었으니 박 대통령이 대한중석의 개혁을 내 손에 맡긴 것이다.

대한중석에 대수술을 가하기 위해 메스를 준비했다. 그것은 내가 들고간 몇 가지의 타협불가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포철에까지 이어지니 다음 회에 설명하기로 한다. 당장 급한 것은 진용 갖추기였다. 개혁은 수술과 같다. 천하의 명의라도 대수술은 혼자서 못한다. 과거나 현재나 개혁에 성공하려면 진용부터 제대로 짜야 한다.

대한중석에 들어서니 인재들이 보였다. 최고 인기 직장이라 일찍부터 모여든 인재들이 있었다. 전무를 맡고 있던 고준식이 그런 사람이다. 57년 내가 국방부 인사처리과장을 할 때 그는 공군 대령으로 국방부 물동과장을 맡아 빼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또 안병화가 대한중석 뉴욕지사에 나가 있었고, 장경환도 보였다. 곽증.주영석.최영춘.심인보.홍건유.이원희.현영환.도재한.이영직.김완규.박종태 …, 이런 이름들이 떠오른다.

그래도 허술한 구석이 느껴졌다. 사장 부임을 앞두고 나는 육군 경리분야 엘리트 장교 두 명의 군복을 벗겼다. 황경노와 노중열. 이들은 미 육군 경리학교를 수료하고 대학에서 회계학 강의도 하고 있었다. 황경노는 54년 내가 육사 교무처장으로 있을 때부터 눈여겨봤다. 보고서 하나를 올려도 눈에 딱 띄게 올리는 유능한 장교였다.

"나하고 같이 가자. 군대보다 장래가 유망할 거야." 나의 권유에 황경노는 흔쾌히 동의했고, 좋은 친구까지 천거했다. 그가 노중열이다.

그들이 3년 뒤 포스코 창업 요원이 됐다. 그들이 나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대한중석의 온갖 고질을 고치고 1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킬 수 있었을까. 아니, 포항제철 건설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내가 대한중석에서 보낸 3년4개월은 우리 멤버가 국가적 사명인 포철 건설을 위한 팀워크를 다지면서 회사 경영의 노하우를 익혔던 시기였다. 치열한 경영수업 기간이었다고 할까. 지금 생각해 봐도 그들과 그 시절을 함께 보낸 것은 나와 포스코와 국가의 복(福)이었다.


2004년 08월 23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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