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 영상
  • 연구결과물
  • E-카다로그
  • 발전기금
  • HOME
  • 박태준의삶
  • 쇳물은 멈추지않는다
  • 인쇄
  • 글자크기
  • 확대
  • 초기화
  • 축소

게시판 List
육사와의 인연 [2004년 08월 18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152



▶ 육사 교무처장으로 재직하던 필자의 신혼 때 모습. 가운데가 모친 김소순 여사이고 왼쪽이 집사람이다.


휴전이 되었고 나는 육군대학에 5기로 입학했다. 육군대학 성적이 장군 진급에 큰 참고가 되는 시기였다. 입교생들끼리 선의의 경쟁을 벌이던 1954년 6월 초순, 마지막 강의시간에 메모가 들어왔다. 교수가 나에게 "자네가 수석으로 졸업하게 된 모양이야"라며 즉시 총장실로 가보라고 했다. 나는 기쁘면서도 뭐가 잘못 되었나 싶기도 했다.

뜻밖에도 이종찬 육군대학 총장 방에는 박병권 육사 교장이 와 있었다. 내가 육사에 입학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줬던 박 교장이 아우를 만나듯 반가워했다.

"자네는 이미 육군대학 교수부장으로 발령났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자네를 육사 교무처장으로 데려가시겠다고 몸소 오셨네."

이종찬 총장이 허허 웃었다. 이 총장도 나에겐 각별한 군 선배였다. 뒷날 4.19 직후의 허정 임시내각 때 국방부 장관을 지내고 장면 정권에서 이탈리아 대사로 나가면서 군복을 벗었던 이종찬 장군. 군의 신망이 두터웠던 그 선배는 61년 말 내가 국가재건회의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 유럽 통상사절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에도 참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탈리아에선 비행기 타고 다니면 바보"라며 자동차로 피사까지 안내해주기도 했다. 또한 63년에 내가 최고회의를 떠날 무렵엔 '부디 군으로 돌아가 우리 군을 잘 지켜 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현역 기간장교 교육도 중요하지만 미래 장교의 양성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박 교장의 이런 논리에 이 총장이 양보할 낌새였다. 나는 "두 분이 정하시는 대로 따르겠다"며 자리를 물러났다. 이렇게 해서 육군대학에서 대통령상으로 금시계를 받고 곧바로 달려간 곳이 진해의 육사였다. 박 교장이 신임 교무처장인 나에게 맡긴 임무는 육사 이전 계획이었다. 열흘 동안 고심하며 정성껏 계획을 수립했다. 전시에 대비한 후퇴계획까지 포함시켰고, 멀리를 내다보며 골프장도 배치했다.

"꼼꼼하게 모두 짚어냈네. 마음에 들어. 완벽해." 박 교장이 동료들 앞에서 너무 칭찬하는 통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전쟁을 피해 진해로 내려갔던 육사는 이 이전 계획에 따라 이해 6월 말부터 단계적으로 태릉으로 복귀하게 된다.

육사는 내가 청춘의 한때를 보낸 곳이었다. 생도 시절은 석달 정도로 짧았지만 '박정희'라는 인물과의 인연이 그때 맺어졌다. 생도 시절을 떠올릴 때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것이'통밀밥'이다. 통밀을 쪄서 밥이라고 줬으니 그게 제대로 소화가 되었겠나. 너나없이 아침마다 설사였다. 재래식 화장실은 붐볐고, 생도들은 하나같이 기력이 빠졌다. 학교 당국은 그게 또 못마땅했던 것 같다. 한번은 우리 동기생 277명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맥이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20여명을 한꺼번에 내쫓기도 했다. 빈곤한 국가의 자존심 강한 집단이 엉뚱한 오기를 부렸던 것이다.

태릉으로 옮겨온 뒤 4년제 1기생이 임관했다. 교무처장인 나는 이들의 학사 학위를 받아내느라 문교부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경성제대 출신의 학무국장은 자기 정도의 대학은 나와야 학사 학위가 어울린다는 듯한 태도였다. 일본 육사를 예로 들면서 육사와 학위는 안 맞는다고 버텼다. 나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웨스트포인트를 나오고도 학사 학위를 갖고 있다"며 맞선 끝에 결국 내 뜻을 관철시켰다.

이 시절에 나는 결혼을 했다. 어머니가 고른 며느릿감은 부산 출신으로 이화여대 정외과를 나온 인동 장씨댁 규수였다. 부산에 가서 선을 봤다. 가난한 장교였지만 신접살림만은 셋방을 면했다. 교무처장 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살림 차린 지 며칠 만이었나. 새색시에게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나라에 바친 몸이니 집안 살림은 알아서 하시오." 혈기 넘친 이 큰소리가 평생을 가고 말았다. 새삼 아내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2004년 08월 18일 [중앙일보 연재]


첨부파일 첨부파일 :
No File!
게시판 List
이전글 대일 교섭의 막후 [2004년 08월 19일]
다음글 징병을 피해 [2004년 08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