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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병을 피해 [2004년 08월 17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47



▶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의 필자는 유도 2단이었다.


중학교에 상주하던 일본 장교 "육사 가라"
징집 연기 혜택 노려 와세다대 공대 진학


1944년 초여름 나는 이야마에서 중학교 5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요새로 치면 고3이었다. 우리집이 아다미에서 이야마로 옮긴 것은 아버지의 일터 때문이었다. 이번엔 댐공사 현장이었다.

당시는 전시체제라 군복에 일본도를 찬 장교가 학교에 나와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도 누런 제복의 일본군 장교가 있었다. 어깨가 딱 벌어지고 눈매가 칼끝 같은 그는 만주 정복과 중국 침략전쟁의 무용담을 늘어놓곤 했다."이틀이나 사흘씩 휴가받았을 때는 그 땅의 모든 것이 내 것이었다."

잔뜩 거드름이 묻은 그의 말씨와 묘한 웃음. 나는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그의 자랑에는 '무한대의 야만적 횡포'를 담은 듯했다. 그 땅의 모든 것을 차지해 봤다는 그의 결론은 항상 똑같았다. "너희도 출전해 승리하면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다. 모두 나와 같은 길을 걷게 되길 촉구한다."

그 무시무시한 장교가 어느 날 나를 불렀다. 학생 개개인의 진로 문제를 놓고 상담을 벌일 때여서 나는 긴장했다. "너는 육사로 가라. 육사는 가장 영예로운 황군이 되는 길이다."그가 다짜고짜 나에게 일본 육사로 가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궁리를 해두고 있었다. "육사는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습니다. 해군사관학교에 가겠다고 하면 허락하실 겁니다." 장교가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끓고 있었다. 내 꾀가 들킨 것이었다. 조선인 학생이 해사에 들어가는 길은 원천 봉쇄돼 있었다. 내가 아는 이 정보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나는 그를 골려 먹은 죄로 톡톡히 벌을 받았다.

그해 가을 우리집에선 내 진로가 골칫거리였다. 내가 사는 동네는 시골이어서 '삐상'(일본인은 B29를 이렇게 불렀다)의 폭격을 면했지만, 이미 대도시는 미군의 공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떡하든 나는 징병을 면해야 했다. 나와 부모님의 목표는 내가 군대에 끌려가지 않고 일본의 패전을 맞는 것이었다.

그런 나에게 육사는 처음부터 피해야 할 대상이었고, 반드시 대학을 가더라도 일류대학의 공대나 사범대에 합격해야 했다. 공대와 사범대는 징집연기의 혜택이 부여됐기 때문이다. 나는 와세다대 공대를 지원했다. 다행히 합격했다. 합격의 기쁨도 컸지만 징집 연기에 대한 안도감 역시 컸다.

이듬해 3월 나는 도쿄의 학교 근처 작은 아파트에 하숙을 정했다. 가까운 곳에 일본 육군의 '호산원기갑훈련소'가 있었다. 입학식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3월 13일로 기억한다. 한밤에 공습경보가 울렸다. 나도 주민들을 따라 방공호로 대피했다. 무려 세시간이 지나 새벽이 돼서야 방공호에서 나왔다. 얼마나 많은 소이탄과 폭탄을 퍼부었는지 온통 불바다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하숙을 정한 건물만 유일하게 말짱했다. '어쩌면 무사히 살아남을 것'이라는 암시 같았다. 입학은 했지만 수업은 엉망이었다.

8월 15일 나는 온천이 많은 산골동네인 군마현에서 일왕의 항복소식을 들었다. 소개령(疏開令)에 따라 피란갔던 곳이었다. 일본의 항복 직후 아버지는 곧바로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국은 소란했다. 나는 학업의 뜻을 품고 이듬해 다시 도쿄로 갔다. 하지만 일본도 어려운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중도에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일본 육사를 간신히 피했던 내가 우리 육사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2004년 08월 17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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