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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과 인연(2) [2004년 08월 12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501



▶ 5.16기념 리셉션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左)이 한신 장군(다시 소장). 필자(당시 의장비서실장(右))와 담소를 하고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마침내 거사는 일어났다. 그때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셋방에 있었다. 박정희 장군이 거사 명단에서 나를 뺀 것이었다. 초조한 새벽이 갔다. 총성 없는 무혈의 아침이 왔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혁명본부로 달려갔다. "기어이 왔군." 박 소장의 이 한마디로 그곳이 나의 근무처가 되었다.

미국과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의 모호한 태도가 불안을 조성하기도 했지만 숨가빴던 며칠이 무사히 지나갔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결성되고, 나는 부의장을 맡은 박 소장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인사명령을 받는 자리에서 비로소 나의 의문이 풀렸다.

"나는 혁명이 실패하는 경우도 가정할 수 밖에 없었어. 실패하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하잖아? 그날이 오게 된다면 자네에게 두 가지를 부탁할 작정이었어. 하나는 자네는 무사히 남아서 우리 군을 이끌어 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가족의 뒤를 봐달라는 것이었어."

박 부의장의 말을 듣고 가슴이 찡했다. 고맙기도 하고 무한한 인간적 신뢰가 벅차기도 했다.

군사혁명정부 초창기의 최고권력자 비서실장을 지내는 동안, 나는 반대편에 섰던 장군들의 처리방안을 놓고 고심하는 박 의장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제 생각으로는 미 대사관과 의논해 미국 유학을 주선하시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김웅수.강영훈.이한림.장도영… 이런 훌륭한 장군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웅수 같은 분은 아예 교수가 되었고, 나중에 조국으로 돌아와 박 대통령과 화해하고 국정에 동참한 분들도 있었다.

나에게 경제공부를 본격적으로 해야 할 기회가 왔다. 그해 9월 최고회의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 옮긴 때문이었다. 국가경제정책 수립에 참여하고, 경제학 교수들을 만나 의견을 들었다. 전문가들과 토의하고 책 읽고 전국 주요 현장을 돌아다녔다. 맡은 일을 완벽하고 철저하게 책임지려는 내 성격이 내 몸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 나날이었다.

경제 공부와 함께 국가경제의 실태를 파악했다. 하지만 너무 한심했다. 전력.공장.도로.항만.공항 등 도대체 뭐가 있어야 파악을 하지. 이건 무(無)의 상태와 진배없었다. 박 의장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넋두리 겸 털어놓은 박 의장의 다짐이 생각난다.

"혁명이 별 건가. 거창하게 보이지만 별 거 아니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거야. 이 모양으로 굶주리고 헐벗어서야 무슨 재주로 사람답게 살겠나? 우리는 목숨 걸고 경제를 일으켜야 돼."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우리가 생각한 모델은 대만과는 반대였다. 대만은 중소기업이 탄탄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중공업부터 일으켜야 했다. 정유.비료.제철이 급선무였다. 그러다보니 울산공단이 산업화 첫 단계에서 가장 부산한 곳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절에 우리나라 산업 형편을 상징할 만한 일화가 많았는데, 얼른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루는 울산으로 내려갔다. 예상했던 것보다 공사 진도가 지지부진했다. 원인은 전력 부족. 상공부 전력국장을 불렀다. 수치상 전국의 발전용량은 20만㎾이지만 실제는 13만㎾밖에 전력을 공급하지 못한다고 했다. 한심했다. 고함이 나왔다. 하지만 고함을 친들 모자란 전력이 생기겠는가. 문득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의 발전선(船)이 떠올랐다. 곧바로 관계 요로에 협조를 얻었다. 발전선이 들어왔고, 울산 공사는 계획대로 진척될 수 있었다.

62년 5월엔 삼척 삼화제철 용광로 화입식에 참석했다. 소규모지만 이튿날 쇳물이 나오기를 빌었다. 서울로 돌아와 연락을 받았다. 우울한 소식이 들려왔다. 쇳물이 끓기도 전에 고로의 불이 꺼져 버렸다나.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제철소 건설을 포함시켰지만, 자칫 공약(空約)으로 돌아갈 처지였다.

제철소만 빼고 다른 계획들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는 편이었다. 농업을 살리기 위한 충주와 나주의 비료공장을 비롯해 울산의 정유공장, 동해의 시멘트공장, 영월의 발전소 등 수지타산이 맞고 앞날이 밝아 보이는 공장들에는 해외차관도 속속 들어왔다.



2004년 08월 12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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