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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과 인연(1) [2004년 08월 11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142


▶ 1959년 육군 대령 시절 미국으로 한달간 연수를 떠날 떄의 모습. 가운데 악수하는 미군 장성 옆에 가방을 든 사람이 다시 연수단장을 맡았던 필자다.



육사를 마친 나는 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6.25전쟁을 겪고 이승만 정권 말기에 이르도록 박정희 대통령을 같은 병영에서 직접 상관으로 모신 적은 없다.

1960년 1월이었다. 그때 나는 대령으로 진급해 육군본부 인사처리과장을 맡고 있었다. 장교인사권을 다루는 요직이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쥐새끼 한 마리 못 들어오게 뒷구멍을 완전히 틀어막아 나에겐 따분하고 괴로운 자리였다. 서류를 들여다보는 내 어깨를 툭 치는 손이 있었다. 뜻밖에도 박정희 장군이었다. "좋은 데 있구먼." "지긋지긋합니다." "박 대령한테는 그렇겠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내가 새로 군수기지사령관이 돼 부산으로 내려가는데, 신설부대엔 참모가 유능해야지. 부산엔 말이야, 회도 많고 술도 많아. 같이 내려가지, 어때?" 나는 얼른 대답했다. "위에다 말씀해 주십시오. 당장 내려가겠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박 장군 휘하의 인사 참모가 되어 부산으로 내려갔다. 회와 술은 핑계였고, 나를 데려간 박 장군은 이미 새 국가의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다.

1960년 2월의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창설부대인 만큼 참모인 나의 임무도 많았다. 어느 날 저녁 동료들이 나를 술집으로 이끌었다. 무슨 계략인지 나에게 술잔이 집중됐다. 하지만 피할 내가 아니었다. 전술을 세웠다. 마치 전투에서 화망구성을 하는 것처럼, 받아 마신 잔은 술이 가장 약해 보이는 참모한테 집중시켰다. 그가 나가떨어지면 그 다음으로 약해 보이는 상대를 골랐다. 최후의 생존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쓰러진 동료들을 챙겨보낸 뒤 나는 부대로 들어가 브리핑 준비를 마쳤다. 이튿날 오전 8시 정각, 박 사령관과 만났다.

"다 뻗고 혼자 뒤치다꺼리까지 했다면서…무쇠덩어리구먼."

박 사령관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간밤의 사태를 미리 보고받은 듯한 그의 얼굴은 그 술자리가 자신이 꾸민 함정이라는 자백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박 장군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셈이었다.

당시 부산에는 요주의 인물들이 드나들었다. 해병대 김동하 장군과 육사 8기 김종필 중령이 대표적이었다. 육본이 색안경을 끼고 부산을 주시했다. 서종철 장군이 직접 감찰을 내려오기도 했다. 25사단에서 모신 적이 있었던 내가 마중나가 술대접을 맡았다.

"뭐 한다는 보고가 많아. 진짜 뭐 하는 거 아니야?" "모여서 술이나 먹고 분통이나 터뜨리는 거지 뭘 하겠습니까?"

그 후 4.19혁명이 터지고 장면 정권이 들어섰다. 하지만 육본은 여전히 부산을 주시했다.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였는지, 박 사령관을 광주로 이동시켰다. 떠나는 박 사령관은 내 경력관리를 염려해 주었다. 최소한 6개월은 근무해야 경력 인정이 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해 9월, 나에겐 뜻밖의 제안이 왔다. 미국 육군부관학교로 연수를 다녀오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1959년 8월 한 달 일정의 미국 연수여행 때 받았던 충격도 생생했고, 이번엔 한 계절이 걸리는 연수이기 때문에 선진문물을 습득할 좋은 기회 같았다. 그러나 혼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부산에서 대전까지 기차로 올라갔다가 광주로 내려갔다. 그 시절엔 그 길이 최선이었다. 나와 마주앉은 박 장군은 육갑을 짚듯 손가락으로 셈을 했다. "내년 1월에 귀국이라고?" "예." "그럼 됐어. 넉넉해. 잘 보고, 많이 배워 놔. 다 쓰일 날이 올 거야."

미국 연수를 마친 내가 서울로 돌아온 것은 61년 새해가 밝을 때였다. 귀국 신고를 하고 새 보직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대구로 내려갔다. 유명한 대구 '청수장'에서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장군을 재회했다. 내가 미국 간 사이에 장면 총리는 육군 고위 인사를 단행했다. 장도영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이 되고, 그 자리의 최경록 장군은 대구 2군 사령관으로 좌천됐다. 이때 최 장군이 자기 밑의 작전참모부장이던 박 장군을 대구로 데려왔다.

청수장에서 박 장군은 '혁명'의 '혁'자도 꺼내지 않았다. 나의 귀국환영을 위해 술이나 실컷 마시자는 거였다. 인사이동에 떠밀려 국가재건의 꿈을 접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라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암울했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2004년 08월 11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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