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 영상
  • 연구결과물
  • E-카다로그
  • 발전기금
  • HOME
  • 박태준의삶
  • 쇳물은 멈추지않는다
  • 인쇄
  • 글자크기
  • 확대
  • 초기화
  • 축소

게시판 List
회사 형태 놓고 격론 [2004년 08월 10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177

▶ 포항제철 현지 시찰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中)이 헬기에서 내려 걸어가고 있다. 뒷편 언덕 위 하얀건물이 현장건설보부인 '로멜하우스'다.


1967년 개천절에 열린 포철 기공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나는 11월 8일 종합제철소 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에 공식 임명되었다. 그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불렀다.

"산업화를 성공시키려면 고속도로와 제철소는 필수야. 나는 경부고속도로를 책임질 테니 자네는 제철소를 맡게. 제철소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그러나 임자는 할 수 있어."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 나에게 보내준 격려였다. 실제로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켰다. 박 대통령은 온갖 반대와 비난을 무릅쓰고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를 개통시켰고, 나는 1973년에 포철 1기 공사를 완성했던 것이다. 포철 1기 공사에 투입된 자금이 경부고속도로보다 3배가 많았으니, 포철 대역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기엔 정치판이 시끄러웠던 것 같다. 선거법 개정을 놓고 여야가 극한적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12월엔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서독의 한국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비틀어 놓았다. 서독은 KISA(대한 국제제철 차관단)의 주요 멤버였던 만큼 포철의 외자 도입에도 나쁜 영향을 미쳤다.

68년 1월엔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터졌다. 북한 124군부대 31명의 청와대 기습 사건이 그것이다. '김신조'란 개인의 이름을 국민의 뇌리에 새기게 만든 이 비극이 가라앉기도 전에 또다시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이 발발했다. 모든 국민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지만, 나는 포철 건설의 책무를 흔들림없이 밀고 나갔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 기억이 남는다.

첫째는 회사 이름. 세가지 안이 나왔다. 고려종합제철.한국종합제철.포항종합제철을 놓고 선택은 대통령에게 맡겼다. "이름을 거창하게 짓는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야." 실질을 중시하는 박 대통령은 망설임없이 마지막 것을 택했다.

둘째는 회사설립 형태. 이를 놓고는 박 대통령과 세 차례나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대통령은 국영기업체로 하자고 했고, 나는 상법상의 주식회사를 고집했다. 내가 물러서지 않자 대통령은 나의 앞날까지 걱정해 주었다.

"일본을 봐.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어느 제철소도 30년 동안 적자를 면치 못했어. 국영으로 해야 적자가 나면 정부가 책임을 지지. 그래야 자네도 편하지 않겠나."

그러나 나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인사관리.경영관리.책임의식 등에서 상법상 회사가 훨씬 유리하다고 주장했지만 박 대통령도 자신의 의견을 쉽사리 거두려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민영기업과 국영기업의 장점을 살린 제3의 형태를 제안했다. 포철을 상법상의 주식회사로 설립하되 정부가 지배주주가 되는 형식이었다.

정부 내에서는 반대가 심했지만, 두가지 방안의 장단점을 두루 살핀 박 대통령은 이 안을 흔쾌히 수용했다. 무려 37년 전에도 이렇게 최고 권력자와 참모들이 사심없고 격의없는 토론을 벌이며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했던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는 사실을 지금의 젊은이들이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인간 박정희와 인간 박태준은 대체 어떻게 인연을 맺어왔기에 그분은 나에게 그토록 과분한 신뢰감을 갖고 있었으며, 나는 그분을 위해 나의 혼을 불살랐을까. 이제 이 얘기를 더 미룰 수는 없겠다.

1948년 늦은 봄날, 나는 21세의 청년으로 육사 6기생이 되었다. 부산에서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다가 남조선경비사관학교란 이름의 장교양성 단기 교육기관에 들어갔을 때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장교가 바로 박정희 대위였다. 그는 눈매나 말씨가 남달랐다.

그도 탄도학 시간에 고등수학 문제를 술술 푸는 나를 눈여겨봤던 것 같다. 수학에 소질이 있었고, 와세다대 기계공학과에 2년이나 다녔으니 내가 동기들 중에 수학문제로 두번째에 설 일은 없었다. 나이 차가 딱 10년인 우리의 첫 인연은 그렇게 '교사와 제자'로 맺어졌다.


2004년 08월 10일 [중앙일보 연재]


첨부파일 첨부파일 :
No File!
게시판 List
이전글 박 대통령과 인연(1) [2004년 08월 11일]
다음글 장 부총리와 갈등 [2004년 08월 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