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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건설 [2004년 08월 08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798


▶ 1968년 11월 포항제철 건설현장사무소(롬멜하우스)로 현지 시찰을 온 박정희 대통령(앞줄 맨 오른쪽)을 안내하는 필자(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점퍼 차림). 박 대통령은 허허벌판을 보며 "박 사장, 이거 어디 되겠나"라며 걱정했다.



"모두 우향웃!"1968년 6월 15일 새벽 4시. 비상소집된 포항제철 건설요원들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수평선 너머로 붉은 태양이 막 솟아오르고, 현장 건설사무소 오른쪽 아래로는 영일만의 짙푸른 파도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외쳤다."우리 선조들의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제철소요.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 모두 저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할 것이오."

소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포항 모래 벌판에 종합제철소를 세운다는 무모한 도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우리는 일을 그르칠 경우 전부 오른쪽에 보이는 영일만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를 '우향우 정신'이라고 표현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로 현장사무소를 '롬멜하우스'라고 이름지었다.

롬멜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사막의 전차 기동전을 이끌었던 독일의 장군이다.그해 4월 1일, 고작 39명의 건설요원과 함께 포항으로 떠나기 전날 밤 나는 집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생각해주시오". 나는 실제로 죽음까지 각오하고 덤볐다. 종합제철 완공 때까지 줄곧 포항 효자동 사택에서 독신 생활을 하는 바람에 나에게는 '효자사 주지'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당시 현장 풍경을 포항제철 30년사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바닷 바람이 어찌나 거세게 부는지 모래가 휘날려 모래 안경을 써야 했다. 입.코.귀에 모래가 들어가 서걱서걱해서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까지도 '안될 일'이라고 등을 돌린 제철소였다."그해 11월,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처음으로 포항 현장에 내려왔다. 모래 바람에 눈을 비비면서 허허벌판을 직접 본 박 대통령은 혀를 찼다.

"여보게 박 사장, 이거 어디 되겠나?" 나를 믿고 내려보냈고, 언제나 자신에 차 있던 그의 한숨에 내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나는 군대에서 단련된 '하면 된다''안 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으로 밀어붙였다. 롬멜하우스 옥상에 '건설''증산' '수출'이란 간판을 큼지막하게 세워놓고, 하루 종일 현장을 돌아다니며 다그쳤다.

70년에는 번갈아 닥친 혹한과 혹서로 열연공장 공기가 석달이나 지연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원료 구입을 위한 해외출장 중에 이 보고를 받고 당장 돌아와 공기 단축 비상령을 내렸다.

하루에 700㎥씩 콘크리트를 타설하게 했다. 하루 300㎥타설도 빠듯한 상황이었다. 24시간 돌관공사가 시작되자 현장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감독요원들은 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고, 피로가 겹친 레미콘 운전사들은 잠깐 대기 중에도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나는 하루 3시간 수면으로 버티며 잠든 기사들의 머리를 지휘봉으로 쳐가면서 독려했다. 결국 비상령을 내린 지 2개월 만에 5개월 분의 콘크리트를 타설해 지연된 공기를 완전히 만회했다.

나는 그 당시 내 부하도 아닌 다른 회사 임원까지 혼쭐을 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안한 일이다. 나중에 현대건설 고위직까지 지낸 모 이사는 당초 약속보다 공사가 늦고 질도 떨어진다는 이유로 회의시간 30분 내내 엎드려 뻗쳐를 해야 했다.

그는 "군대에서 허리를 다쳐서…"라며 어물거렸지만 나는 용납하지 않았다. 이 일로 현대건설 측에서 "아무리 그래도 남의 회사 임원인데…"라고 반발해 한때 포철과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

도로 포장이 공기를 제대로 못 맞췄을 때에는 포철 담당 부장과 함께 대림건설 담당 부장에게도 엎드려 뻗쳐를 시켰다. 아마 당시 현장 요원들 가운데 나에게 지휘봉으로 배를 찔리거나 정강이를 걷어차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금과 기술이 부족한 상황이라 정신력과 몸뚱이로 버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사람은 미치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아니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죽어도 공장만은 지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사명감으로 우리는 뭉쳐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공사 현장을 '신앙촌'이라 부르기도 했다." 포철이 안정궤도에 접어든 78년 3월, 공채로 뽑은 신입사원 특강에서 내가 했던 말이다.


2004년 08월 08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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