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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에게 던진 질문들 [4년 08월 05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349


▶ 1997년 12월 19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일산 자택으로 필자 등을 초청해 대통령 당선 축하 만찬을 열었다. 참석자들은 만찬에 앞서 대통령 당선증을 펼쳐보이며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이희호 여사, 필자.


1997년 5월. 4년2개월 만에 포항을 다시 찾았다. 감회 어린 귀국이었다. 정치 보복을 당했던 내가 떳떳이 재기하는 유일한 길은 선거였다. 7월 24일로 포항시 북구 보궐선거 날짜가 잡혔다. 대선에서 YS를 돕고도 그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당한 허화평 의원이 비운 자리. 경쟁자는 포항이 고향인 7선 관록의 민주당 이기택 총재였다.

선거 슬로건을 "'겡제'는 가라! '경제'가 왔다!"로 정했다. YS의 경제적 실정(失政)을 겨냥하며 정면 대결하겠다는 승부수였다. YS는 '경제'를 항상 '겡제'로 잘못 발음했다. 나는 거리 유세에서 이런 경고도 했다. "제2차 대전 말기 맥아더가 일본을 접수한다고 선언한 것처럼, 이런 식으로 가면 해를 못 넘기고 낯선 코쟁이가 김포공항에 내려 한국 접수를 선언할 것이다." 모두가 무슨 말인지 의아해했다. 불길한 내 예언대로 그해 말 외환위기(IMF 사태)를 맞았다.


일흔살에야 지역구 후보로 처음 나선 선거. 나는 최선을 다했다. 승리가 확정된 순간, 칠십 평생 최초로 완전한 나의 의지로 정치의 길에 들어섰다.

그해 9월 중순, 나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 영남과 호남의 화합"을 역설했다. 경제를 망쳐먹은 YS가 정치마저 실패한 이유는 자신의 아들로 상징되는 권력형 부정부패 때문만은 아니었다. 산업화 세력을 무시하고 지역 갈등을 외면한 탓도 컸다.

9월 28일. 도쿄에서 월드컵 예선 한.일전이 열렸다. 김대중 후보도 날아왔다. 같은 호텔이었다. 한국의 승리. 기분 좋은 만찬에서 DJ가 귀엣말로 "내일 아침을 같이 하자"고 했다. 어차피 거쳐야 할 담판이었다. DJ가 내 기대를 충족시키면 즉석에서 마음을 열고, 아니면 바로 마음을 닫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예의를 지키면서도 오랫동안 작심했던 네 가지 질문을 던졌다. 문답을 요약하면 이렇다.

-영남권에선 무조건 DJ를 거부하는데.

"그래서 당신 같은 분이 필요하다."

-DJ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약속을 못 지킨 측면이 있다. 30년 박해 속에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면도 있었다."

-당신은 진짜 어떤 색깔인가?

"내 희망은 우리 손자들이 자유로운 체제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통.반장까지 호남이 다 차지할 거라고 하는데.

"YS가 PK 출신들과 측근들로 요직을 채웠다가 실패했는데, 어리석게 내가 그 전철을 밟겠나?"

나는 마음을 열었다. DJP 단일화를 위해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자리에선 재벌 개혁에 대한 의견도 나누었다. 나는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80년대 중반에 우리 재벌의 개혁 방안을 연구하게 했고, 그 연구 결과를 숙독한 일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해 11월 'DJT'란 신조어가 생겨났다. 그해 대선은 내겐 포스코 최고경영권을 되찾아 철강 전문인에게 넘겨줘 회사를 바로 가게 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의 갈림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풍전등화인 국가운명이었다. 기어코 외환위기가 왔다.

외환위기는 뜻밖에도 YS와의 어정쩡한 재회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하기 직전, 3당 대표 협조를 구하기 위해 청와대로 초청한 것이다. 나와 김대중 후보, 이회창 후보, 이렇게 셋은 11월 21일 청와대로 갔다. 5년 만에 YS를 만났다. 그러나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구원(舊怨)에 매달릴 수는 없었다. 다만 나라를 왜 이 모양으로 관리했느냐는 원망은 얼른 지워지지 않았다.

예상외로 YS는 당당해 보였다.

"멀쩡하네." "그러면 죽은 줄 알았나."

반말조의 뼈 섞인 농담으로 그와 나는 5년 만의 인사를 대신했다. 우리는 민자당 시절부터 말을 트고 지냈던 사이였다. 이날의 '회의 아닌 회의'에서 내가 거의 도맡아서 했던 말은 뒤로 미루자.

그해 대선에서 DJT연합은 간신히 이회창 후보를 이겼다. 대선 승리는 50년 만의 수평적 정권교체이자 민주주의의 진일보였다. 그 후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나는 사심 없이 일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DJ는 끝까지 도쿄 약속을 지켰는가? 끝까지 YS의 전철을 밟지 않았는가? 이에 대한 판단은 국민과 역사의 몫이다.


2004년 08월 05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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