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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박태준과 그의 마지막 계절(2001년-2011년)

  • 2001년 여름, 일흔네 살의 박태준은 미국 코넬대학 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았다. 소요시간 6시간 30분. 집도의가 갈비뼈 하나를 잘라내고 폐 밑에서 적출한 것은 3.2킬로그램의 물혹이었다. 그 뿌리 부위에는 규사 성분이 검출되었다. 영일만에서 들이마셨던 모래가 발병의 근원이라는 점을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건강을 회복한 박태준은 귀국 후 포스코(2002년부터 바뀐 사명) 명예회장으로서 소일거리 수준의 대외활동을 하는 가운데 2008년부터는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으로 봉직하기도 했다. 2004년 12월 박태준의 삶을 비평적으로 정리한 평전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총 856쪽, 현암사)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한국사회가 박태준을 정당하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듬해에 그 책의 중국어판이 베이징에서 출간되었으며, 2010년 1월 『철의 사나이 박태준』이란 제목으로 그 책의 축약본이 베트남어판으로 출간되었다.

    박태준의 건강에 ‘2001년 수술의 후유증’이 불길한 징조로 대두한 것은 2011년 봄날이었다. 잦은 기침과 간헐적인 각혈이 그것이었다. 그해 9월에 박태준은 포항제철 초기에 영일만 모랫바람 속에서 함께 고생했던, 퇴역한 현장 직원들과 재회하는 자리를 가졌다. <보고 싶었소! 뵙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행사의 제목이었고, 말 그대로 이뤄진 재회의 장소(포항시 지곡동 포스코한마당체육관)에 모여든 400여 명의 노인들은 체육관을 눈물의 호수로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박태준은 당부했다. 포스코의 종잣돈이 대일청구권자금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거기서 고도의 윤리성이 나온다, 포스코는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와 기획에 의해 탄생했으며 그분이 나를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울타리가 돼 주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조업과 건설 중에 유명을 달리한 동지들을 항상 기억하라.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강조했다. “포스코의 역사 속에, 조국의 근대화 역사 속에 우리의 피와 땀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인생의 자부심과 긍지로 간직합시다!”

    2011년 12월 13일 오후 5시, 마침내 박태준은 숨을 멈추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두 번째 대수술을 받고 끝내 일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고인의 유택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 이승의 삶을 마친 박태준은 다시 박정희의 이웃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