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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종합제철(POSCO)을 세계 최고로 키우다 (1968년~1992년)

  •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POSCO)가 탄생하면서 박태준은 창립 사장으로 취임했다. 창립요원 39명 중 고로를 직접 본 적 있는 사람은 사장뿐이었다. 기술과 경험이 없었다. 자본도 없었다. 무(無)의 상태였다. 자본(차관도입)과 기술은 KISA라 불린, 1966년에 조직된, 한국 종합제철소 건설을 맡기로 한 국제컨소시엄이었다. 미국, 영국, 서독(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5개국의 8개 철강회사로 구성돼 있었다. 그러나 KISA는 한국의 종합제철은 시기상조로서 실패할 것이라는 세계은행(IBRD)의 평가를 근거로 1969년 2월 무렵부터 계약 불이행의 신호를 보내왔다. 포항에는 이미 제철소 부지 정지작업이 완공을 향해 가는 시점이었다. 그때 미국으로 들어가 KISA가 지원하지 않을 것을 간파한 박태준은 귀로의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자금의 일부를 전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박정희 대통령의 승인을 받는다. 또다시 무산될 뻔한 종합제철 건설의 새로운 돌파구를 뚫은 사건이었다.

    포철 1기, 연산 조강 103만톤 체제의 종합제철소는 1970년 4월 1일 대일청구권자금 및 일본 차관 약 1억2천만 달러와 일본기술단의 기술협력을 받아 착공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박태준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이니 실패하면 우향우하여 영일만에 투신하자!”는 ‘우향우 정신’과 “철강 대업을 성공하여 나라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제철보국 정신’을 불어넣으며 사명의식, 솔선수범, 선공후사, 미래전략이 혼연일체가 된 탁월한 리더십으로 포철을 이끌어나가고, 박정희는 그러한 박태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설비구매 등에 재량권을 백지 위임한 이른바 ‘종이마패’로써 포철을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철저히 보호해주면서 1968년부터 1979년 사이에 무려 13차례나 포철을 방문하는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보내주었다. 이것은 포철을 성공의 미래로 가게 하는 레일이 되고 포철 임직원들의 헌신을 한껏 끌어올리는 힘이 되기도 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갑작스런 서거 후, 박태준은 몸소 포철의 울타리 역할을 자임하면서 정계에 진출 하지만, 박정희가 마지막 선물처럼 남겨준 제2제철소 대임의 약속을 묵묵히 실천해 나갔다. 그것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종합제철로 평가 받는 광양제철소 건설이었다. 4기로 나눠서 건설된 광양제철소의 1200만톤 체제가 완공된 것은 1992년 9월 30일이었다. 그날 박태준은 광양 준공식에 ‘포항제철 4반세기 종합준공’이란 경축 아치를 세웠다. 한국이 철강 2100만톤 시대를 열어젖힌 날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가 ‘임무완수의 영혼보고’를 올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민자당(여당) 최고위원 사임을 비롯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당선이 확실시 되는 여당 대통령 후보 김영삼의 선거대책위원장 제의도 뿌리친 채 포항제철 회장 자리에서도 스스로 물러난다.

    포항제철이 한국산업화의 견인차가 되었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70년대나 80년대에 자동차, 조선, 전자, 기계, 건설 등 한국의 모든 철강소비 업체들에게 당시 국제 철강시세보다 30% 내지 40%를 싸게 공급하여 그들이 세계시장의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본체력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좋은 품질의 철강재를 싼값에 안정적으로 공급’하고도 박태준의 포항제철은 첫해부터 시작된 흑자행진 속에서 세계 최강, 세계 최고의 철강회사로 성장했다. 더구나 그는 포철의 주식을 단 한 주도 받지 않음으로써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기업인’의 세계적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이것은 박태준을 위대한 기업인으로 칭송 받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 교육의 새 지평을 열다
    박태준은 포항제철(POSCO) 최고경영자 25년에 걸쳐 포항과 광양에 유치원, 초, 중, 고교 14개교를 세워 순수한 포철의 자금으로 한국 일류 사학으로 키웠으며, 1986년에는 한국 최초의 연구중심 이공계 대학인 포항공과대학교(포스텍)을 세워 세계적인 명문대학으로 육성하는 데 정성과 열정을 바쳤다. 그것은 박태준의 인생과 정신에서 제철보국과 함께 양대 축을 형성한 ‘교육보국’의 실천이었다.
    박태준의 그 원대한 교육보국 구상은 1970년 포철에 들어온 보험회사 리베이트 6000만 원이라는 돈에서 출발했다. 그 돈을 받은 그가 청와대로 들고 가서 대통령에게 “이것은 포철의 예산에서 빼낸 것이 아니고 공돈이니 통치자금에 보태 써시라”고 하자 박정희는 “임자 마음대로 써라”며 돌려줬고, 이에 박태준은 임원들과 협의해서 그 돈으로 교육보국의 모태가 되는 제철장학회를 설립했다. 그때가 1970년 11월. 포철이 처음 세운 교육기관은 포항의 효자제철유치원이었다. 그러나 박태준은 그로부터 15년 만에 포스텍을 설립하고 20년 만에 포항방사광가속기 설립까지 시작한다. 박태준의 원대한 미래전략이 실현한 ‘포항제철의 교육’은 그대로 한국 교육의 새 지평을 여는 시대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