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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경제 일꾼으로 나서다(1961년~1967년)

  • “자네를 거사명단에서 뺀 이유는 두 가지야. 내가 실패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경우를 생각했어. 그럴 때 자네는 우리 육군의 지도자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고, 자네에게 내 처자(妻子)를 부탁하려고 했어.” 1961년 5월 16일 거사에 성공한 박정희가 이틀 뒤에 박태준을 따로 불러서 한 말이었다. 박태준은 그 전폭적이고 완전한 신뢰에 눈시울이 뜨끔했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는 그에게 비서실장을 맡겼다. 그해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 박태준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정치방면이 나날이 복잡해짐에 따라 비서실장 사임 건의를 올리고 상공담당 최고위원을 맡게 된다.

    드디어 박정희가 박태준을 경제방면에 배치하여 박태준이 국가경제를 위해 헌신할 앞길이 열린 것이었다. 그해 연말에 그는 구라파통상사절단장으로 유럽을 다녀온다.

    1963년 민선 대통령에 당선한 박정희는 국회의원도 장관도 싫다며 미국 유학을 가려고 하는 박태준을 붙잡아 한ㆎ일국교 정상화 사전작업을 위한 10개월 장도의 일본 특사로 보낸다. 이때 박태준은 일본의 전후 경제발전 실상을 목격하고 가슴에 울분을 품는다. 그해 12월 박태준은 대한중석 사장에 임명된다. 황경로, 안병화, 노중열, 장경환, 박종태, 홍건유 등 4년 뒤 영일만 모래사장으로 함께 이동할 동지들과 만난 박태준은 적자의 대한중석을 1년 만에 흑자체제로 바꾼다. 실질적인 경영수업, 그 탁월한 성과를 박정희가 지켜보고 있었다.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공식적으로 ‘종합제철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맡긴 때는 1967년 11월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65년부터 종합제철을 설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