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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군인으로 살다  (1948년 ~1960년)

  • 1948년 봄날, 드디어 박태준은 길을 잡는다. “건국(建國)에는 반드시 건군(建軍)이 필요하다”라는 결심을 굳히고 부산 국방경비대에 자원, 곧 서울 태릉의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다. 여기서 그는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인연의 인물인 박정희와 만나게 된다. 박정희 대위는 사관학교 2중대장으로서 탄도학 강의도 맡고 있었다. 탄도학 첫 시간. 고등수학이 요구되는 어려운 문제를 거뜬히 풀어내는 박태준 생도.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은 처음 의미 있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육사 생도 6개월 동안에 박태준의 영혼을 건드린 사람이 바로 열 살 더 많은 스승이요 선배인 박정희였다.

    소위로 임관한 박태준의 동기들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취임식을 빛내는 장교들로 참석했다. 건국과 건군, 그의 젊은 꿈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미군 철수에 이은 1950년 6.25전쟁 발발. 이때 박태준은 38선(철원) 전방부대 중대장이었다. 개전 사나흘 만에 서울 미아리고개까지 후퇴하는 상황에서 동료 중대장 12명 중 10명이 전사한 가운데 요행히 운이 좋아 멀쩡히 살아남은 박태준은 ‘잔여병력을 한강 이남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무사히 한강을 건넜다. 그리고 끝없는 후퇴의 연속이었다. 경주를 거쳐 포항 형산강까지 밀려난 풍전등화의 시간, 마침내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고 북진의 명령이 떨어졌다. 후퇴의 속도만큼 빠른 속도로 진군한 박태준의 부대는 함경북도 청진시청에 태극기를 꽂고 더 북진한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으로 1.4후퇴가 단행된다. 그는 급성맹장염에 걸려 야전병원에서 수술한 몸으로 들것에 실린 채 함정에 올라 강릉으로 내려왔다.

    1953년 휴전을 앞둔 때, 박태준의 마지막 전투는 화천수력발전소 방어작전이었다. 상대는 중공군이었다. 피아간 상당한 전사자를 냈지만 결국 임무를 완성한다. 그리고 휴전 협정 타결. 가슴에 무공훈장을 셋이나 꽂은 박태준은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신념을 가슴에 새긴다. 그것은 그의 일생에 걸쳐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는 필생의 나침반이 된다. 포성이 멈춘 뒤 그는 육군대학에 입학, 수석으로 졸업하며 대통령 하사품인 금시계를 받고, 1954년 육군사관학교 교무처장에 부임했다. 이때 필생의 동지가 되는 후배장교 황경노와 처음 만나게 되고, 그해 12월 필생의 반려자가 되는 이화여대 출신의 부산 아가씨 장옥자와 결혼한다.

    1956년 국방대학원을 졸업하고 국가정책담당 교수로 일하다가 국방부 인사과장으로 부임하지만 1군 참모장 박정희 장군의 권유를 받아 25사단으로 옮겨가 참모장, 연대장을 역임한다. 이때 유명한 ‘가짜 고춧가루 폐기’와 ‘부패 군납자 교체’라는 개혁을 일으켜 박정희의 더 깊은 주목을 받게 되며, 1958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는 시가행진 부대를 지휘한다. 1959년 생애 처음 미국 연수를 다녀오게 되고, 1960년 2월초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하는 박정희의 요청에 따라 육군본부 인사처리과장 자리에서 박 사령관의 인사참모가 되어 부산으로 내려간다. 부산에서 박정희와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는 약 6개월, 그것은 두 인물을 완전한 신뢰관계로 묶어주는 시간이었다. 박정희는 부산에서 거사를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4.19혁명. 박태준은 부산시청 통제관으로서 부산지구계엄사령관 박정희를 완벽하게 보좌했다. 그해 여름의 박정희 좌천 후 박태준은 두 번째 미국 연수를 떠났다. 그리고 그해가 다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