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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에서 청년까지  1927년 ~ 1947년

  • 1927년 9월 29일(음력)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아버지 박봉출과 어머니 김소순 슬하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박태준(朴泰俊)은 6세 때 아버지가 생업을 가진 일본으로 건너가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내며 ‘식민지 아이로 지배자의 땅’에서 성장했다. 이 시기가 그의 인생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이른바 ‘조센진’이라 불려야 했던 차별과 멸시에 대한 설움과 아픔이 오히려 그의 내면에 극일(克日)정신의 뿌리로 안착하고 그것이 ‘일류국가’를 향한 염원으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일본에서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내며 익히게 된 일본어와 일본문화가 뒷날에 국가와 포스코를 위하여 일하게 되는 때를 맞아 한일관계에서 어렵게 꼬인 일들을 풀어나가는 중요한 자산으로 활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청년 박태준은 1945년 도쿄의 와세다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머잖아 도쿄를 떠나 산골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때 도쿄는 미군으로부터 폭격을 당하는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그해 8월 15일 정오에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 일본 왕의 무조건 항복선언을, 그는 산골에서 방공호 따위나 파는 생활을 하다가 듣게 되었다. 가슴의 밑바닥에서 뜨거운 희열이 북받쳐 올랐다. 일본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만세!”를 부를 수는 없었으나 주먹을 불끈 쥐고 눈물을 흘렸다.
    해방 직후, 박태준은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귀국, 귀향을 했다. 서울에 가서 전공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학업의 길을 찾지 못한다. 일본에 들어가서 대학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와 동량이 되겠다는 계획으로 혼자서 다시 도쿄에 들어가지만 1947년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그해 가을과 겨울을 고향집에거 칩거하며 인생의 길을 모색한다.